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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이 칼럼 4

      건국 초기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설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총 궐기 해야 한다. 그 우선순위는,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바로세우고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을 제정할 것이며, 제주도 4.3폭동과 광주 5.18 국가변란의 역사를 바르게 다시 써야하며,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북에 가서 저질은 6.15선언이나 10.4합의는 김구-김일성 방식의 남북합작을 위한 망국적 망상의 반복이며 우리나라 정계에서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철저하게 척결 되어야 한다. 2009. 3. 1에 기독교 성직자 831명이 시국선언을 했는데 6.15 선언과 10.4합의를 실천하라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수없이 많은 국난을 겪으면서 생존을 하였지만 교회들이 부패하고 역사인식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으며 북한의 대남공작에 오염되었던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정신으로 건국한 이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야한다.     이승만 바로세우기 운동을 우리는 서둘러야한다. 북한해방을 통한 민족통일이 임박한 이때에 그 일을 다그쳐야 하는 이유는 김일성 일가의 집단이 붕괴된 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그날을 새로운 국가의 탄생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에, 소위 통일이 달성 된다고 해도 그것은 대한민국의 잘못된 현실을 바로 정리한 것뿐이며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연속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우리의 건국 국부는 이승만 대통령이며, 국기는 태극기이고, 국가는 지금의 애국가로 고정해야한다.   대한민국은 건국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우리의 건국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 위대하고 감동적인 사례가 발견되며 그 역사의 주도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탄생되는 민주주의 국민국가 건설을 위하여 1948년 5월 10일에 국민이 투표하여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들이 선출되고 국회의장에 선출된 이승만은 개원 연설에서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게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성취 되었다〉고 하였고, 종로 갑 구에서 당선된 이윤영 의원 (감리교 목사)을 불러내어 개원 기도를 시켰는데 그분의 긴 기도 내용은 국회 개원이 아니라 교회 부흥회를 방불케 하였다. 이 기도 내용은 미국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버금가는 훌륭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건국이념이 담겨 있다. 1948년 8월 15일 건국기념식에서도 대통령 이승만은 헌법 책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할 때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는 충실한 대통령 직을 이행 하겠다〉고 선서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기독교정신을 밑에 깔고 건국된 나라다.  이처럼 훌륭한 우리의 건국역사를 무시하고 종북 세력과 전교조는 지금 철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그런 인간들이 대한민국의 정부와 법조계와 언론계 연예계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있다.    마이클 칼럼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2024-04-19

[기고] 나라를 세우고 지킨 사람 바로알기

미국의 대륙군(미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가장 존경한다. 그의 일생이 나라를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전쟁 영웅이자 독립운동가로 미국이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닦았다.     최근 화제를 불러온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록이다. 영화를 관람하며 가슴이 찡해 오는 감동을 받았고 주인공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진 면목도 새삼 알게 되었다. 영화는 그의 인생을 조명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시종일관 조국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존경하는 관람객은 상영 도중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영화 덕분에 건국 대통령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한층 더 반듯하게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잊혔던 이승만 대통령의 많은 업적이 국민 사이에서 집단기억의 형태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75년에 태어나 1965년 별세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유학 중에도 정치활동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 분단된 38선 이남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1948년 최초로 시행한 총선거를 거쳐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임기 중이던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에 제소,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을 끌어냈다. UN군 참전 덕에 국군을 서울을 탈환했으며 북진을 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대통령 직선제 개선을 통해 2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과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발발하자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라며 성난 시위군중을 피해 하와이로 망명했다   영화 건국전쟁은 개봉 27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역사를 올바르게 알 기회”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행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농지개혁 등이 대한민국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것들만 부각한다. 이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주장한다.     돌이켜보면 1949년 6월 발생한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막 출발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자유민주주의 철학에 제동이 걸렸다. ‘남로당 프락치 사건’은 제헌국회의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해 13명의 현역 의원이 김일성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다.     어느 책에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상이 소개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해방 후 전력 부족으로 전기가 시간제로 공급될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가 촛불을 켜 놓고 남편의 낡은 양말을 손수 꿰맸다는 글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그 장면을 그려보면서 그 시절 시골 가난한 농부의 생활과 다름이 없다고 느껴졌다.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을 1948년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세운 망명 임시정부 시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은 국민, 국토 및 주권의 3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역사를 입맛에 따라 평가하고 양념을 치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 모름지기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에 왜곡과 혐오의 언어들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지 자문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나라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 초대 대통령

2024-04-01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영화 '건국전쟁'통한 국민 대각성 반가워"

      "영화 '건국전쟁'은 국민 대각성의 횃불을 올리고 있다.  이승만은 '국부'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다. 지금까지 민족반역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업적을 폄훼 했는데, 늦었지만 기념관 건립, 주미대사관 동상 설치, 영화를 통한 국민 대각성이 함께 이뤄져 다행스럽다."     1976년6월부터 2000년 2월까지 CIA요원으로 남북한의 굵직한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 마이클 이(한국명 이명산) 박사가 본보를 찾았다. 1933년 생,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시사평론, 방송패널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상영회에 맞춰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그 중요성을 이야기 했다.   이 박사는 "대한민국의 탄생이 결국 이승만 독립투쟁의 결실"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독립투쟁 40년 기간동안 온몸으로 습득한 이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반만년 군주국가에서 국민이 나라 주인 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킨 것이야말로 그 어떤 역사적 위인들보다 큰 일을  해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이밖에도 농지개혁, 교육제도 확립, 그 무엇보다도 한미동맹의 확고한 성립"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판하는데, 그 혼란했던 한국전쟁 와중에도 이 대통령은 선거를 실시 시켰고, 국회는 정상적 기능을 했고, 야당은 정부를 원하는 대로 비판했으며, 언론자유 역시 보장됐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에 덧붙여 이 박사는 "우리나라는 왜 8월15일을 광복절로만 기념하면서 이 날을 대한민국의 생일인 '건국절'로 기념하지 못하는가" 탄식했다. 그는 "지구상 200여 나라 중 건국일을 기념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라고 했다. 이 박사는 이같은 이유가 "좌파사상에 물든 친북세력이 대한민국을 여전히 국민들이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비정상적 국가로 규정하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 마이클 이 박사는 통역 사병 1기 출신으로 1958년 한국 주둔  미502군사정보단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74년 도미하기까지 약 15년간 대공업무, 특히  체포된 간첩, 무장공비 등을 심문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당시 미군은 '한미양해각서 미8군 G2 정보 훈령 I-65'에 따라 대공 수사, 대공 정보활동을 주도했다. 한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미군이 주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상황은 74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권한을 이양할 때까지 계속됐다. 마이클 이 박사는 이 시기에  실미도 사건, 김신조 1.21 사태, 송추 무장공비 사건, 황태성 사건, 무장간첩 김동기 사건 등을 직접 조사했다.   미국으로 이민온 지 2년여 후, 당시 CIA 국장이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 친필로 자기 소개서를 보낸 이 박사는 CIA에 특채됐다.  그 이후 이 박사는 미국 정부를 위한 대북 첩보 수집 등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이 박사는 주요 활동으로 "신상옥 최은희 부부 탈출을 직접 지휘했고, KAL 폭파범 김현희, 황장엽 씨 등을 직접 조사했다"고 밝혔다. 그 밖의 내용은 "CIA가 허가해주지 않는 한, 무덤까지 갖고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회고록 증보판 개정 및 출판 작업을 위해 곧 한국을 방문한다. 증보판에는 지난 초판에서 다루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추가 한다고 전했다.     한편, 워싱턴 중앙일보는 18일자부터 마이클 이 박사의 '이승만 재조명'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건국전쟁통 국부영화 이승만 대통령 국민 대각성 영화 건국전쟁

2024-03-18

한미동맹USA재단 워싱턴 헨리 송 지회장

    '이승만 건국 대통령 재평가 논쟁'을 일으키며 한국에서 100만 관객 돌파한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워싱턴 지역에서 오는 16일과 17일 양일간 버지니아 타이슨스 코너 쇼핑센터 내 AMC 16극장에서 상영된다.    이번 상영회는 한미동맹USA재단 워싱턴 지회 주최로 이승만 대통령 기념연구 교육재단(양동자 이사장), 원 코리아 네트워크가 주관한다. 이번 상영을 추진한 한미동맹USA재단 워싱턴지회장 헨리 송 회장(원 코리아 네트워크 정부관계 담장자)이 본보를 찾았다.     송 회장은 우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연장 상영도 검토 중"이라고 알렸다. 그는 "첫 날인 16일 6시 상영회가 이미 매진된 상태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 고무된 상태"라고 말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 역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수십년간 '부패한 독재자'라는 이미지로만 점철되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자"라는 재평가 운동이 지난해부터 거세지는 가운데, 워싱턴 주미대사관의 동상 건립도 추진 중이다.    이번 영화의 상당 부문도 이승만 대통령이 오랜 기간 살았던 워싱턴 DC와 관련됐다. 그런 까닭에 헨리 송 회장 역시 김덕영 감독을 도와 영화 속 그렉 브레젠스키 교수와의 인터뷰를 직접 촬영하는 등 참여 했다고.     헨리 송 회장은 스스로 영화를 보고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알지 못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던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또한 송 회장에게 "영화를 보고서야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일을 했는지, 왜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돼야만 했는지 처음 알게됐다"는 한인 2세를 포함하는 미국인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뿌듯함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반면에 "왜 독재자를 미화하는 영화를 미국에서까지 상영하려 하느냐", "이승만 때문에 통일이 되지 못한 걸 아느냐"라고 소리치는 아우성도 들었다고. 송 회장은 그런 그들에게 "일단 차분히 영화를 보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갖자고 이야기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와 함께 헨리 송 회장은 “오늘날 세계에서 빛나는 대한민국의 번영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선각자인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설계한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뒷받침이 되어 왔다”라고 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부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왜곡하고 위대한 이미지를 지우려는 노력을 끈질기게 해왔는데 영화 '건국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는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 회장은 "김'건국전쟁' 상영은 미국 동포들과 자녀들에게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과 더불어 모국 한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이 기회로 올바른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관과 자긍심을 함께 느끼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편 미국내 비영리단체인 한미동맹USA재단(이사장 김명혜)은 제작사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미국 주요 도시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상영회 개최를 추진했다.  재단 측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번영의 초석이 되는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 차원의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미국에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한미동맹 워싱턴 한미동맹usa재단 워싱턴지회장 이승만 대통령 워싱턴 지역

2024-03-13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동맹 설계"

    이승만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워싱턴지회(회장 정세권) 주최, 합동회의 및 특별강연회가 23일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에서 열렸다.     정세권 회장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이 북한의 침략을 받았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으로 상호방위협력조항이 맺어진 역사적 사건을 잘 기억해야한다”면서 우리의 자손들이 이승만건국대통령의 업적을 기억해 해외에 살지만 조국발전을 염려하고 애국심을 발휘하는 후손들이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특별 강연자로 나선 문무일(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미국과 한국이 피로 맺어진 ‘혈맹’ 관계임을 강조하며 1953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미방위체제는 한국방위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는 “1950년대 구호물자로 생활하던 눈물어린 시절, 조약 체결을 바탕으로 한국은 방위력 증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며 “대한민국 사람들은 각자가 영웅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이므로 지금은 정치인들이 깨어나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려 있다”고 말했다.     이날 포럼은 김용돈 목사가 개회기도를, 워싱턴 글로리아 크로마하프 연주단(단장 김영란)이 축하공연을 했으며, 이범 목사의 폐회기도로 마무리 되었다.  김윤미 기자 kimyoonmi09@gmail.com한미동맹 대통령 이승만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승만 대통령 한미동맹 설계

2024-02-29

다시 되돌아보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

1. 들어가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의 삶과 죽음, 그 속에 담긴 독립운동지도자로서의 면모, 대한민국 건국과 개혁, 6.25 전쟁과 극복, 한미동맹과 경제발전 등 한국 현대사의 구비 구비들을 시계열 방식으로 새롭게 파헤친 김덕영 감독의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요 즘 한국 영화가에서 뜻밖에도 관객동원에 큰 성공을 보이고 있다.  이 영화가 높은 시청률 을 보이면서 롱런(Long Run)할 전망을 갖게 해주는 것은 감독과 제작진들의 노력의 결과 이다. 하지만 지난 60여 년 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졌거나 잊혔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 사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살려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생존 인구의 20%가량을 차지하는 70, 80대의 연령층은 이승만 박사를 다소 아는 분들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조국 광복과 건국, 6.25 전쟁과 한미동맹 등 한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역사의 재단사로서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분들은 의외로 적다.   특히 4.19혁명 이후에 태어난 세대(윤석열 대통령도 1960년생)들은 이승만을 부정하는 선전이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생장했다. 또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학력, 경륜, 지성 면에서 자기보다 훨씬 출중한 이승만 박사를 일부러 무시하거나 외면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도 자기와 비교해서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을 골라 우대했다. 영화 ‘건국전쟁’의 우위성은 한국의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사의 진실이 무엇이었던가를 배우지 않았거나 지워져서 잘못 알았거나 바르게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궁금증, 갈증을 채워주고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가를 사실(Facts)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진 진실을 실증 자료를 통해서 바로 잡아주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모처럼 한국의 다큐 영화가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실을 세운다)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 같아 반갑다. 영화를 제작한 김덕영 감독은 시청자가 100만을 넘어서면 비로소 현대사를 보는 국민의 정치의식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2.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 이승만 대통령이 역사 속에서 철저히 짓밟혀진 것은 대한민국 역대 정권들의 건국 대통령을 무시, 외면이라는 졸렬한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한의 김일성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음모가 가장 큰 원인이다. 김일성은 자기 정권이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보다 2년 앞선 1946년 2월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출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더 나아가 전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전쟁범죄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존재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엄청난 범죄의 책임을 모면하고 그가 세운 북한 정권을 한반도의 정통정부로 조작하기 위해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유엔 등 국제사회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기 죄과를 덮어씌우고 철저히 부정해야 했다.   또 북한의 남침을 유엔이 합법적으로 세운 정통정부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 유엔군의 힘으로 북한의 남침을 물리친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릴 필요성을 절감했다. 1948년부터 시작된 북한 대남 심리전의 핵심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 심리전 공작을 당시 소련이 운영하는 국제공산주의지휘부인 콤민테른 (Comintern)과 제휴하여 펼쳤다. 당시 북한의 심리전 구호는 “독재자 이승만,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으로 민족을 분열시킨 원흉, 동족상잔의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으로 만들고 이승만을 매도하는 물심양면의 심리전에 총력을 경주했다.   제주 4•3폭동, 여순 반란사건 역시 고강도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 방안이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그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의 대남 심리전은 이승만 대통령을 매도하고 지우고 부정하는 일을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반이승만(反李承晩) 심리전은 1960년 4.19로 이승만이 하야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자기에 대한 북한의 지명공격이 아니고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이를 맞받아 치지 않고 방관하거나 외면했다.   북한 대남공격의 본질은 자연인 이승만에 대한 공격이 아니고 대한민국 성립의 정당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들은 북한의 이승만 공격을 빙자한 건국 정당성에 대한 공격을 건성으로 넘기거나 무방비로 방치했다. 역대 정권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심리전 공세를 주목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를 틈타서 북한의 사론에 오염된 국내의 좌파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든 ‘조선통사’(朝鮮通史)를 마치 정설인 양 받아들이는 학문적 모반에 나섰다.   ‘분단시대의 현실인식’(姜萬吉 집필)은 “모든 통일은 옳다”는 논리를 조작, 통일사관을 내세우고 민족을 인권을 가진 개개 성원의 구성체로 보지 않고 ‘개인은 전체의 일부’라는 논리로 민족을 규정하면서 ‘우리민족끼리’라는 허구적 담론(민족사관)을 꺼내 들어 한국 현대사 왜곡에 앞장섰다. 이들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지우고 부정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역사 반란을 일으켰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 (George Owell)의 ‘1984년’의 좌익 사관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사학계의 이러한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관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제기되었다. 하지만 전교조 패당들의 반발에 밀려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정부는 확고한 입장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문제 자체를 사실상 방기했다. 그러면 역대 정권들의 현대사를 보는 안이한 태도와 철학의 빈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3. 주사파 세력의 등장   김일성의 대남 심리전은 1980년에 이르러 한국 대학가에 주사파들이 활개를 치고 등장할 여건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부 좌파 사학자들이 떠드는 통일사관은 ‘어떤 통일’인지를 묻지 않는다. 통일은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공산화 통일도 좋다는 의미다. 공산화 통일을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주창한 세력은 하나같이 반통일세력이 되고 민족 분열세력이거나 친일파로 몰았다.   김일성이 민족해방전쟁이라면서 일으킨 6•25남침도 통일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며 유엔감시하의 자유 총선거로 세워지는 대한민국을 반대하기 위해 제주에서 일어난 4•3폭동도 공산통일을 지지한 것이므로 민족통일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회고컨대 1980년대는 한국이 제2차 산업혁명에 성공, 대기업이 중심이 되어 수출입국을 통한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가 벌어지면서 평등가치의 요구가 부상하였다. 이런 상황을 틈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은 김일성의 이른바 주체사상을 적극 보급, 선전하고, 이에 오염된 주사파 대학생들은 북한의 대남방송을 들으면서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는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말려들었다.   대한민국의 우파 세력들은 이러한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철학과 합당한 통치 경륜을 갖추지 못하고 좌파 공세에 밀리다가 급기야는 광우병 파동에 크게 흔들렸고, 뒤이어 튀어나온 탄핵 시위를 표방한 촛불 테러에 걸려 정권을 좌파 수중에 넘겨주고 말았다. 환경이 이러할데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국민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것이다.   김일성 대남전략은 일단 그 성공의 절정에 도달한 것 같았다. 주사파들의 공세를 업고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 정권은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계속 자동차를 왼쪽으로 몰아가는 해괴한 정치를 펴나갔다.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우파의 경제적 기초를 잠식하고 정권유지를 위한 축재에 광분하는 등 공정과 상식의 척도에 비추어 가히 ‘암흑시대’라고 규정해도 좋을 만큼 불량 실패정권의 길을 걸었다.   한편 국가 주권을 수령이 쥐고 있는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모든 수령독재정권들이 당면하는 숙명처럼 북한을 지구 최빈국으로 만들어 지구촌의 누구도 가서 살고 싶지 않은 불량국가(Rogue State)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선동 선전을 앞세워 간신히 선거로 집권에 성공했던 한국의 좌파 정권은 다시 우파 정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현대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태다. 이어서 윤석열 정권이 탄생했다.       4.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재생(再生)   문재인 정권이 퇴진하고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면서 문재인 시대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들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역사 면에서 나타난 사건은 2023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148주년 탄신일에 각 대학의 4•19 노장 세대들 60여 명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된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 묵념함으로써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4•19세대와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인 역사적인 아픔의 다리를 건너뛰면서 화해의 역사에 나선 것이다.   이 행사는 국민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탄신기념행사에 정부를 대표해서 참석한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이승만 박사기념관을 만들 필요성을 역설했다. 뒤이어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립유공자로서 보다는 대한민국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분의 기념관을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 성금으로 건립하고 그 분의 공과에 관해서는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공정히 평가하여 역사의 귀감을 삼자고 주창했다.   이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민간에서 조직되고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다. 또 같은 해 9월 1일에는 이승만 박사 양자인 이인수(李仁秀)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 4•19 유족들과 부상자 가족들에게 유족 대표로 사과하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이인수 박사가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밝힌 사과 발언에 대해 4•19단체들은 사과의 진정성이 인정된다면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4•19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놓여있던 모든 걸림막들은 일거에 걷히고 일단 화해 국면이 펼쳐졌다.   이에 연(沿)하여 이승만 박사를 바라보는 국민적 시각도 새롭게 정향(定向)되는 분위기 속에서 몇 편의 다큐 영화들이 나왔다. 권순도 감독의 영화 ‘기적의 탄생’은 이승만 박사의 생애를 그분의 업적 중심으로 잘 엮었다. 또 이승만 포럼의 인보길, 대표와 김효선 사무총장이 주도한 ‘독립 외교 33년’은 외교 독립노선을 내세운 이승만의 독립외교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그리고 요즘 영화가에서 상승세를 타 조만간 관객이 100만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영문명: 대한민국의 탄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자료화면을 충실히 모아 보여주었고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레이터들을 적절히 배치, 자료화면으로 부족한 부분을 잘 메꿔 나갔다. 전문성이 뛰어난 분들을 잘 배치했으며 특히 외국인 중에서 이승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을 나레이터에 포함시켜 원어로 발언한 내용을 자막으로 옮겨 설명함으로써 자료의 신빙성도 높였다. 다만 선명치 못한 자막이나 나레이터를 활용해야 할 부분과 자막으로 처리되어야 할 부분이 엇바뀐 부분들은 개선의 여지를 남겼다.   어떻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우리 역사 속에서 재평가되고, 다 시 살아난 것은 축하할 일이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가 70여 년을 공들여 성공시켜 온 이승만 지우기, 이승만 죽이기가 한국사에서 다시 뒤집혀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목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난다면 김일성과 DPRK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옛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의 위성국가가 됨으로써 민족분열, 국토분단, 동족상잔의 모든 책임을 지는 원흉집단’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김정은이 2023년 말 지난 80년 간의 모든 대남공작이 완전 실패였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하고 침공 정복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남북한은 민족도 같지 않다”고 발언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부활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5. 기억되어야 할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업적   이승만 대통령은 그 업적을 독립노선과 건국 및 호국 노선의 양면에서 살피기로 한다.     가. 독립노선 이승만이 남긴 큰 공헌은 두 가지다.   ⑴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그는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국제사회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해방은 무장투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3•1 독립운동도 무장투쟁이 아닌 세계 여론을 향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발산한 것이었다. 우리의 해방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으로 길이 열렸다. 그는 해외 망명 생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언론을 통해 한국독립 운동의 대의를 밝히고 연합국 지도층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 지지를 호소하는 서신 외교, 독립을 호소하는 강연, 조선의 독립을 호소할 국제회의 참가 시도, 재외동포의 결속과 교육에 헌신했다.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출간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일본의 미국침공을 예측한 책으로 발간 6개월 후 일본의 진주만 침공이 가시화되자 그의 예측 능력이 평가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여사의 서평으로 한국 사정에 대한 미국사회의 이해를 제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홉킨스(Harry L. Hopkins)가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조항을 포함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 학자는 말했다.     ⑵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이다. 그는 미국의 하와이에서 머나먼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반도를 대륙 세력의 꼬리로 간주, 북방의 대륙 세력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정학적 숙명론에서 탈피했다. 한반도를 해양 세력의 대륙진출 교두보로 인식하면서 해양 세력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일 자유민주체제로 독립 국가를 세울 것을 꿈꾸었다.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독립 국가건설 노선을 관철시켰다. 오늘날 대륙세력의 꼬리가 된 북한은 지구 최빈국에 머물고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승만의 건국 지정학의 선견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나. 건국과 호국노선   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장한 헌법제정   1948년 5월 10일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에서 선출된 198명의 의원들과 더불어 이승만은 초대 국회의장으로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03개 조의 헌법 초안을 매 개 조마다 투표로서 확정, 민의를 반영한 민주헌법을 제정하였다.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들과 국호와 수도만 다르게 표현하고 내용을 모두 똑같이 한 위성국 헌법을 채택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은 지금 주권이 수령에게 있고 한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⑵농지개혁 관철   해방당시 한국농민의 90%가 소작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매입(有償 買入), 유상분배(有償分配)라는 획기적 방식으로 농지개혁법을 마련, 전국의 농민을 자영농민으로 만들었다. 지주가 소유한 3정보를 초과하는 농지를 모두 국가가 지가증권으로 매입한 후 이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고 농지를 받은 농민들이 매년 소출의 모두 20%씩을 5년간 상환하면 분배받은 농지를 자기 소유로 전환해주는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 예컨대, 브라질이나 필리핀은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3,274정보의 농지를 개인이 소유한 한반도 최대 지주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지지함으로써 사유재산 침해라고 저항할 지주들을 설득,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이로써 농민들은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공산당의 선전,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토지를 지키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실히 수호하였다.     ⑶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이 조약은 이승만 안보외교의 금자탑이다. 외교사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협상을 통해 지구 최약(最弱)국가의 대통령이 지구 최강자인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벼랑 끝 외교를 벌인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이를 ‘한미공수동맹’이라면서 만족해 하였다. 한국은 이 조약을 통해 미군을 지난 70년 이상 한반도에 주둔시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했고 현재도 주둔이 계속되고 있다. 이 바탕 위에서 한국은 경제발전에 전념, 2차대전 후 신생독립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이런 안전장치 없이 미국의 요구대로 휴전에 동의했더라면 한반도의 휴전도 키신저(Kissinger)가 만든 베트남 평화조약처럼 공산당의 협상전략에 휘둘려 중국과 소련이 포함된 북방 공산세력의 재침을 막지 못하고 베트남처럼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미 방위 조약이 체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인상적인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한미간에 체결된 “이 조약 덕분에 앞으로 우리 후대들까지도 안보의 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담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올해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양국간에 비준된 지 70주년을 맞는다. 앞으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칼럼은 한반도선진화재단이 2월 20일자로 발행한 Hansun Brief 제287호에 게재된 글로, 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아버지 이승만 건국 대통령

2024-02-21

[기고] 왜 ‘건국전쟁’을 보아야 하는가

지난 16일 오렌지카운티 CGV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를 관람했다. ‘건국전쟁’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100여분 동안 다룬 영화다.   70년 전인 1954년, 맨해튼의 100만 인파 속에서 진행된 이 대통령 카퍼레이드 장면은 장관이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솟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 미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다니…. 시작부터 큰 감명을 주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왜곡은 한국 현대사에서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건국전쟁’은 이념의 잣대로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 재단되고, 그것이 진실인 양 여론을 호도하며 독버섯처럼 번져 젊은 세대의 역사관까지 흐려놓은 이념 전쟁의 실상을 기록물과 증언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정치적 이념에 갇혀 오류 투성이의 건국 역사관에 너무 오래 눈 감고 입 닫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김덕영 감독이 집념으로 만든 영화 ‘건국전쟁’이 근현대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영화는 1875년에 태어나 한국 역사상 최대 암흑기에 살았던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삶의 흔적을 더듬고, 생생한 기록과 증언으로 그의 역사적 업적을 고찰함으로써 역사의 엄중함을 일깨웠다.   사실 필자도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혼돈에 갇혀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책으로 배우는 것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편협한 이념이 논리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영화 ‘건국전쟁’은 잘못된 한국사를 정립하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본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한반도는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지만 하나의 국가로 건국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건국됐지만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독립의 환호가 혼돈의 시대로, ‘건국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그 후 펼쳐지는 남북의 엇갈림은 이념의 차이로 인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미 준비된 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교육받고, 독립운동과 건국 운동을 주도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우선 민주주의 근간인 투표제를 확립했다. 당시엔 획기적으로 남녀에게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해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했으며 이어 헌법제정, 초대대통령 선출 등으로 국가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북한이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남한에서도 공산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실시해 소작농도 지주가 될 수 있도록 했으며, 기업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으로 나라가 자칫 공산화될 수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국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 나라를 구한 것은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중 자신은 대전으로 피신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나쁜 대통령으로 치부됐다. 그리고 3·15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을 초래했고 결국 스스로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대통령으로 인식됐다. 그를 향한 독설이 급기야 독재자, 매국노로 왜곡 날조되기도 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막대한 자금을 빼돌렸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허위로 드러났다. 이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시절 생활비가 없어 교민들의 성금으로  궁핍하게 생활했고, 말년에는 하와이 요양병원의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딱한 사정을 안 병원 측이 무료로 진료해 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 곁에서 쓸쓸히 영면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흔적을 깨우며 애통함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느끼게 했다.     영화의 앤딩과 함께 관람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제작진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건국전쟁 헌법제정 초대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 카퍼레이드

2024-02-20

"이승만 건국 대통령 위한 사업들, 적법한 단체가 주도해야"

    워싱턴 주미 한국 대사관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동상 건립이 추진중인 가운데, 한미 정-재계, 학계 저명인사들이 주축 돼 지난 11월2일 발족한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모임'에 양동자 이승만 대통령 기념연구 교육재단 이사장이 주도적인 역할로 관심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본보를 찾은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재평가가 이뤄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각종 기금모금 및 사업들은 동포들을 호도하지 않도록 '투명'하고 '적법'한 단체들만이 주도해야 한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 모임'에는 한국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의화 전 국회의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윤석열 대통령의 지도교수였던 송상현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 등이 함께 하고 있다.     미국에선 양동자 이사장을 비롯 한국 전쟁 당시 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의 외손자 조셉 맥크리스천 주니어, 흥남철수의 영웅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증손자 벤자민 포니가 참여했다. 양동자 박사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당시 발족 모임을 설명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의 별세소식과 함께 워싱턴 주미대사관의 동상 건립이 확정돼 참석자들의 만감이 교차됐다"고 전했다.    동상은 민간이 추진모임을 주도하며 정부가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될 전망이다. 양 박사는 "보훈부와 대사관과 직접 긴밀히 소통하고 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해 미주 한인들과 전 대한민국이 하나 되어서 업적을 기려야 하며, 이 대통령을 숭모하는 국민 감사 사상이 확립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양동자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숭모하는 모든 적법한 단체들은 '이화장'을 중심으로 고 이인수 박사의 뜻에 따라서 지시 받으며 활동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이사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미국에 워싱턴, 필라델피아, LA, 시애틀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까닭에 양 박사는 "최근 워싱턴에 대대적인 언론 광고를 내고 워싱턴에 '이승만 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본부'를 발대 했다는 단체가 어떤 적법성을 갖고 운영되는지, 투명하고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는 우려를 전했다.     특히,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올 초 '기념관 건립'을 목적으로 발족한 '방계조직'인 재단법인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어떤 루트로 해외동포지도자협의회라는 모호한 조직이 기념재단과 관계를 맺고 미주에 '기념모금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게 됐는지... 이 과정이 명확해야 한다"고 양 박사는 힘주어 말했다.     양 박사는 또한 "미국서 모금운동을 하려면 비영리단체로 공인된 조직이어야 가능하다"면서 "'모금 본부'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엄중한 책임감을 갖는지 모르는가? 급조된 단체가 비영리단체 지위로 동포들에게서 걷어낸 성금을 제대로 IRS에 밝혀 한국으로 보낼 역량이 되는지, 단체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끝으로 양동자 박사는 수십년간 '독재자'로 매도 되었던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대한민국의 오늘날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주역이었으며, 새롭게 재평가 된 건국 대통령의 역사적 업적들이 앞으로 들어서는 한국 정권들의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변치 않는 역사'로 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인 주미 한국 대사관에 들어설 '이승만 동상'과 차후에 마련될 워싱턴의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이 그 증거가 될 것이란 바람을 전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대통령 이승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 양동자 이승만

2023-12-05

[기고] ‘힘에 의한 평화’ 밑거름 한·미동맹

10월 1일은 6·25 한국전쟁 중 육군 제3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이다.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에 이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고 올해 75주년을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전방 부대를 찾아 “북한이 도발하면 1초도 기다리지 말고 응사하라”고 지시했다. 경기도 최전방 부대인 육군 제25사단 관측소에서 대북 경계 상황을 살핀 윤 대통령은 GOP 초소 근무 병사 등을 만나 격려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광복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또 10월 1일은 1953년 휴전 후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하다. 한·미동맹은 가장 성공적인 동맹의 하나로 상호 노력과 깊은 신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동안 한·미 양국은 군사, 경제, 기술협력, 인적 교류 등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앞으로도 미래를 위하여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 ‘행동하는 동맹’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올해 ‘국군의 날’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군의 시가행진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시가행진에 직접 참여해 장병·시민과 함께 행진했다. 감회가 새롭다. 대규모 군 병력과 장비가 동원된 시가행진은 2013년 이후 10년 만이다. 항공기의 공중분열에는 미 공군도 참여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행사는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과 함께하는 축제의 장으로도 평가를 받아 흐뭇했다.     6·25 전쟁의 포화를 뚫고 탄생한 한미동맹은 70년간 북한의 도발을 막고 대한민국이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번영의 토대가 됐다. 대한민국은 이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고,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탈바꿈했다. 아마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벌써 공산화되고 우리는 세계 최악의 빈곤·위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중국·러시아·일본에 둘러싸여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한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천운에 가깝다는 평가다.     사실상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도 한·미동맹이다. 휴전에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대미 외교 성공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등 최신식 무기를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그리고  수백병의 군인을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시켜 국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당시 한국이 사용하는 국방비의 87%에 해당했다. 한국은 국방비에 쓸 돈으로 경제 개발에 매진했다. 덕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지난 정부 당시 한·미연합훈련은 4년이나 중단됐다. 남북군사합의란 이름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할 다수의 전방초소(GOP)도 철거해 군의 물리적 기능을 약화했다. 이제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고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통해 동맹이 제자리를 찾았다. 앞으로 동맹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굳건한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장병들의 헌신으로 이룩한 자유대한민국의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모름지기 ‘한미동맹’은 함께 가는 길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밑거름 미동맹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2023-10-11

[기고] 한미동맹 70년, 돌아본 한국의 두 기둥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두 기둥이 있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이 빈곤국에서 벗어날 수 있게 기반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완전한 국가가 세워지지 못했다.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신탁통치로 혼돈의 정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 대통령은 3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거부하고, 반탁·반공 노선을 견지했다.     그 후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선출된 200명 국회의원이 국호와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의해 대한민국은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이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지개혁과 한미동맹 강화다.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법 공포로 남한에서도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북한은 이보다 앞선 1946년에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완성했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소유권을 불허했지만, 경작권을 갖게 된 북한 농민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당시 남한의 많은 농민은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식 농지개혁은 자본주의 상징인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있었기에 수용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으로 갑신정변으로도 폐지 못한 양반 계층이 사라졌고, 반봉건적 농지 소유제를 타파하고 농민의 농지 소유제를 확립했다.   또한 ‘한미동맹’이 있다. 북한의 1950년 6월 25일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낙동강까지 밀린 남한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며 전선에 세력균형이 형성되자 휴전회담 논의가 진행됐다. 남한의 동의 없이 진행된 회담이라 남한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과 중국 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조인됐다.     이 대통령이 반대한 정전협정으로 북한의 재남침이 우려되자 한·미 양국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것이 ‘한미동맹’의 시작이다.  ‘한미동맹’은 70년간 북한의 도발을 막고 한국의 평화와 번영, 자유의 토대가 됐다.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벌써 공산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중국·러시아·일본에 둘러싸인 한국이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천운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의 기둥은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 근대화를 통해 빈곤 퇴치에 힘썼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현대화를 이뤘다. 박 대통령은 철강 산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포항제철소를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와 서울 지하철 건설, 중화학 산업 육성, 군 현대화와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 등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한국을 자랑스러운 나라로 탈바꿈시켰다.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공과 과가 따른다. 하지만 두 분은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 6대 군사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돌아보면 두 분의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과 통찰력, 탁월한 외교력과 안보관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했다고 본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한미동맹 한국 이승만 대통령 농지개혁법 공포 초대 대통령

2023-10-04

[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추진 의미

지난달 28일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해 민관 합동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추진위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자유의 가치가 다시 확립되고 한미동맹이 재건되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되찾는 길에서 꼭 해야 할 것이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일”이라고 했다.   사실 이 전 대통령은 긍정적 평가보다 정파와 이념, 시대조류에 편승 저평가된 부분이 많았다. 그나마 이제라도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이 추진되어 다행이다.   이 전 대통령의 미국에서의 활동은 대단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1년 8월 초 ‘일본 내막기’를 출간해 일본의 군사적 팽창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펄 벅이 썼다. 그녀는 서평에서 “미국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인들을 위해 집필되었으며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만 할 때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것이 진실임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이 서평은 뉴욕에서 발간되던 월간 잡지 ‘아시아’의 1941년 9월호에 실렸다.     이 책은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및 육군장관 등에게도 보내졌다. 결국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일본의 본성을 아는 해안을 가졌다. 또 이 전 대통령은 1945년 2월 미·영·소 세 나라가 모인 얄타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세력범위 하에 두기로 밀약을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당시 미국의 대표 언론그룹 소유주인 허스트 캐슬에게 보냈다.     이 전 대통령은 “귀하와 같은 언론계 인사들이 그것을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만일 이러한 일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아들들은 앞으로 15년 이내에 제3차 세계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징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허스트 계열의 신문들이 일제히 얄타 밀약설을 보도하자 국무장관 대리 그루는 6월 8일 얄타회담에서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선언에 위배되는 어떠한 비밀협정도 체결된 바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전 대통령이 출처가 분명치 않은 얄타 밀약설을 제기한 배경에는 그의 뿌리 깊은 반소·반공의식과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소 유화정책에 대한 깊은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한반도가 해방되었지만 38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3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그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맡으면서 미·소가 합의한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등 반탁·반공노선을 견지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46년 12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며 로비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 노선의 입지를 강화해 주었다. 그 후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초대 국회의장에 이 전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3선에 성공했지만,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1960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서거 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전 대통령 사후 58년 동안 “건국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공과를 놓고, 진영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면서 기념관 건립 시도는 매번 좌절됐다.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일각의 폄훼·왜곡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늦었지만 후손들에게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만들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추진 이승만 대통령 얄타 밀약설 기념관 건립

2023-07-24

[특별기고]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올해는 한국과 미국이 역사성을 지닌 뜻 있는 해다. 한미동맹이 70년을 맞아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윤석열의 대미외교’에 국민 시선이 쏠렸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유’를 선택한 윤 대통령의 국제외교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당당함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과 2023년의 윤석열 대통령 연설의 키워드는 ‘자유’였다. 자유란 쉽게 얻어지는 상품이 아니다. 자유에는 피를 먹고 자라는 섬뜩함이 있고, 자유란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 끊임없는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외교(外交)’로 빛나는 시대다. 외교가 전략이라면 국격(國格)에 걸맞은 외교활동은 지도자의 몫이다. 대한민국은 1940년대 열악한 국제환경을 딛고 건국한 나라다. 독립에서 건국에 이르는 건국 지도자 이승만 외교는 국제환경에 걸맞은 ‘전략외교’로 점철되어 있다.   “외교정책(外交政策)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은 생존(生存)과 국가안보(國家安保)다…대표적인 수단이 동맹(同盟)이다!” 신현실주의(New-realism) 이론가인 국제 정치학자인 케네스월츠 박사의 주장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잘 모르고 있다. 건국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왜일까?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왕의 나라를 백성에게 돌려준 공(功)이 있다. 더 소중한 일은 그가 공산주의의 대척점에서 자유를 신봉하며 ‘자유민주주의 뿌리’로 각인되었다는 점이다.   1954년 미국의 국빈 방문(State Visit) 때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 정치인들을 향하여 ‘워싱턴 겁쟁이들(Cold feet)’이라며 일갈(一喝)했다. 자유(Freedom)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의 반공주의(反共主義), 멸공(滅共)에의 의지를 미국에 던지는 경구(警句)이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현재도 이승만을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로 인식한다. 1923년 그가 설파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메시지로 통한다.   이승만 외교의 분수령은 무엇보다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의 변화였다. 문명사적인 대전환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동맹문화라는 새로운 지평(地平)을 열어줬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대등한 외교’가 축(軸)을 이뤘으며, ‘한미동맹’의 주역은 이승만이었다. 약소국이라는 약점을 딛고 미국 측을 설득하며, 움츠러들거나 물러섬 없이 담대한 전략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사시켰다.   1953년 휴전 반대를 선언하며 북진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은 자유를 쟁취하려는 몸부림이면서 한미동맹을 견인하는 지렛대로 작용했다. 미국이 ‘눈엣가시’인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계획인 ‘에버레디 플랜(Ever Ready Plan)’을 세웠다 내린 것은 반공 지도자 이승만의 진솔한 움직임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으리라. 1954년 7월 28일 오후 5시 이승만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 나서자 조셉 마틴 주니어 하원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소개했다. “미국 국민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자유를 위한 불굴의 투쟁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때 도와서 함께 싸운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워싱턴 의회 연설에서는 미국의 어머니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미 인사들이 함께한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행사에서는 이 대통령의 눈물로 숙연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전쟁터에서 자유를 위해 피 흘리며 산화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여과 없이 표시한 것이다.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원 양원 합동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기립박수를 포함해 모두 33회의 박수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 성명도 인상적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70년 동맹…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한미동맹을 주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지닌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은 무엇일까? 6·25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항구적인 안전핀 구축이면서, 자유를 지키려는 한미 양국의 돈독한 의지의 결집(結集)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면서 이승만 지우기가 멈췄다. 좌 편향된 교육에다 보수 정권의 무관심으로 이승만 지우기는 끝 간 데가 없었다. 국민은 권력 이동과 더불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국론분열의 심각함을 체감하고 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자유민주주의 뿌리인 이승만 현상이다. 황일봉 /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미주총회 사무총장 장로특별기고 한미동맹 이승만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건국 대통령

2023-06-26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에서는 “친일파들을 중용해 민족정기를 흐렸다.”고 그를 비난한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좌파로부터는 “미국에 붙어 단정(單政)  수립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도 공산화되어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묶였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문명개화의 꿈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개화파 지식인 이승만의 공이다.     작가 복거일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남은 평생 ‘협박’을 하고 산 사람이었다. 그분은 협박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 말을 반박해 봐라. 못하겠으면 선택하라. 나를 꺾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를 것이냐, 나와 협력할 것인가, 나를 밟고 갈 것인가.’그는 미국 사람들에게 잘 통했다. 미국인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빠른 문화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남과 타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미군 장성들이 흔들렸다. 그는 대만의 경우처럼 제주도로 옮기는 척하며 미국을 협박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이 매우 큰 분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첫째,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이승만은 유엔군이 북진을 망설이자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버린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89년 펴낸 회고록 〈군과 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과 중국측은 부상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다시 포로 교환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서한’을 보냈다. 중국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힐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과 야포, 함포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썼다. 이런 ‘협박’은 가진 것이 없는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이 즐겨 써왔던 수법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 부통령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또 다른 돌발행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법’이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한미군사동맹은 이승만의 소신과 집념의 산물이다. 미국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전쟁이 재발하면 16개 참전국 군대가 돌아온다’고 약속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립서비스를 믿고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은 공산화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프린스턴대 동문들과 조지워싱턴대 동문들을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그 의지를 전격적인 반공 포로 석방으로 보여주며 미국을 압박했다.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 책무의 이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날카로운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미동냉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지난 70년의 우리 역사는 이승만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으로서 기능해 왔다     군사동맹은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산 교훈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이웃 나라의 힘에 굴복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더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거나 이웃 나라보다 강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 해체를 맞이하여 독립했을 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조건으로 핵무기를 러시아에 양도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핵무기를 뺀 재래식 군사력 기준으로 세계 6위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이니 아무 탈 없을 것 같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있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 안보를 100% 확보하기 어렵다. 한미군사동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요청인 것이다.     지난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행사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 된 것에 반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가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친미, 반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다.     김지민 기자한미동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혜안 아이젠하워 대통령

2023-04-20

[이 아침에] 모국의 숨결

모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봇물 터지듯 모국을 향하는 발걸음들이 바쁘다. 망설이며 설렘 속에 기다렸다. 예전과 다른 마음 자세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남편의 신장 투석에 필요한 재료를 미리 택배로 보냈다. 의약품 용법상 어려운 통관을 거쳐야 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제자의 환영 메시지를 들으니 모국 방문의 목적에 힘이 실렸다.   서울의 첫 새벽, 커튼을 열어젖히니 안산, 인왕산, 북악산이 파노라마와 같이 눈앞에 펼쳐졌다. 웅장한 산의 자태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서대문 사거리에 위치한 숙소 27층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광은 도읍지로서의 빼어난 면모를 갖춘 듯했다. 인왕산 자락의 정기는 북악산을 타고 남쪽 한강으로 흐른다. 인왕산 기슭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지은 한양도성 성곽이 멀리에서도 보인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은 푸른 기와집이 보였다. 바로 청와대다.     네 살 때 미국으로 떠난 딸에게 모국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는 ‘Blue House’로 1948년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살던 곳이야”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고 일제는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일본 패망 후 이 관저를 물려받아 사용한 1948년 이승만 대통령부터, 경무대라는 명칭 대신 청와대로 바꾸어 부른 윤보선 대통령, 이어 박정희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화강암 석조에 지붕은 푸른빛의 청기와가 얹혀 있다. 집무 공간인 본관, 공식 행사 공간인 영빈관, 외빈 접견 장소인 상춘재, 부속기구인 대통령비서실, 경호처, 언론 창구인 춘추관, 녹지원, 수궁 터 등이 있었다. 위 산기슭으로 올라가니 주거 공간인 관저가 있었다. 청기와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은 빨간 단풍과 대비되어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기둥의 비례, 창문 살의 형태, 대청마루 또한 고향 집의 평화로운 안온함을 풍겨 주었다.     도자기 굽듯 구워낸 ‘청와’는 현재 창덕궁 선정전에 남아 있고, 경복궁 근정전 등 일부 건물에도 사용했으나 일반 기와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단단한 기와다.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일상용품까지 청자로 만들었다. 청자로 만든 기와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고, 염초, 안료 등을 수입해야 했기에 비용이 많이 드는 세계적으로 귀한 유물이다.   청와대는 백악관과도 비교되어 견주어진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관저를 미영전쟁 때 영국군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을 불태워 시커멓게 탄 외벽을 흰색 페인트칠하여 백악관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개방된 청와대를 거닐 수 있었다.     졸업 후 50년 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났다. 곱게 물든 단풍처럼 고왔던 날들. 십 대의 그리움이 묻어 있는 추억 속에 흩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을 메꾸듯 사그라졌다. 어릴 적 내가 보였고 내일에 대한 기대에 찼던 눈빛이 다가왔다. 까르르대는 웃음 속으로 나이의 그림자도 날려 보냈다. 봉직했던 교육 현장을 떠나기까지 성실하게 다져진 대학 친구들의 모습 또한 흐뭇하고 아름다웠다. 보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 친구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숨어있던 온정을 끌어내고 내일에 활력을 주었다. 이들이 있기에 모국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나 보다.     고국을 떠난 지 35년째인데도 만나는 사람들은 어제도 곁에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났어도 제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놀랍게 발전한 서울과 그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의 위치를 재검하며 다짐하는 여정이 되었다.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모국 숨결 모국 방문 모국 역사 이승만 대통령

2023-01-02

[이 아침에] 모국의 숨결

모국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봇물 터지듯 모국을 향하는 발걸음들이 바쁘다. 망설이며 설렘 속에 기다렸다. 예전과 다른 마음 자세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남편의 신장 투석에 필요한 재료를 미리 택배로 보냈다. 의약품 용법상 어려운 통관을 거쳐야 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제자의 환영 메시지를 들으니 모국 방문의 목적에 힘이 실렸다.   서울의 첫 새벽, 커튼을 열어젖히니 안산, 인왕산, 북악산이 파노라마와 같이 눈앞에 펼쳐졌다. 웅장한 산의 자태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서대문 사거리에 위치한 숙소 27층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광은 도읍지로서의 빼어난 면모를 갖춘 듯했다. 인왕산 자락의 정기는 북악산을 타고 남쪽 한강으로 흐른다. 인왕산 기슭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지은 한양도성 성곽이 멀리에서도 보인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은 푸른 기와집이 보였다. 바로 청와대다.     네 살 때 미국으로 떠난 딸에게 모국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는 ‘Blue House’로 1948년부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살던 곳이야”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고 일제는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일본 패망 후 이 관저를 물려받아 사용한 1948년 이승만 대통령부터, 경무대라는 명칭 대신 청와대로 바꾸어 부른 윤보선 대통령, 이어 박정희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화강암 석조에 지붕은 푸른빛의 청기와가 얹혀 있다. 집무 공간인 본관, 공식 행사 공간인 영빈관, 외빈 접견 장소인 상춘재, 부속기구인 대통령비서실, 경호처, 언론 창구인 춘추관, 녹지원, 수궁 터 등이 있었다. 위 산기슭으로 올라가니 주거 공간인 관저가 있었다. 청기와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은 빨간 단풍과 대비되어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기둥의 비례, 창문 살의 형태, 대청마루 또한 고향 집의 평화로운 안온함을 풍겨 주었다.     도자기 굽듯 구워낸 ‘청와’는 현재 창덕궁 선정전에 남아 있고, 경복궁 근정전 등 일부 건물에도 사용했으나 일반 기와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단단한 기와다. 청자의 나라였던 고려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일상용품까지 청자로 만들었다. 청자로 만든 기와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고, 염초, 안료 등을 수입해야 했기에 비용이 많이 드는 세계적으로 귀한 유물이다.   청와대는 백악관과도 비교되어 견주어진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관저를 미영전쟁 때 영국군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을 불태워 시커멓게 탄 외벽을 흰색 페인트칠하여 백악관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개방된 청와대를 거닐 수 있었다.     졸업 후 50년 만에 여고 친구들을 만났다. 곱게 물든 단풍처럼 고왔던 날들. 십 대의 그리움이 묻어 있는 추억 속에 흩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을 메꾸듯 사그라졌다. 어릴 적 내가 보였고 내일에 대한 기대에 찼던 눈빛이 다가왔다. 까르르대는 웃음 속으로 나이의 그림자도 날려 보냈다. 봉직했던 교육 현장을 떠나기까지 성실하게 다져진 대학 친구들의 모습 또한 흐뭇하고 아름다웠다. 보고 싶은 사람과의 만남, 친구와 가족과의 이야기는 숨어있던 온정을 끌어내고 내일에 활력을 주었다. 이들이 있기에 모국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나 보다.     고국을 떠난 지 35년째인데도 만나는 사람들은 어제도 곁에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났어도 제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놀랍게 발전한 서울과 그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의 위치를 재검하며 다짐하는 여정이 되었다.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모국 숨결 모국 방문 모국 역사 이승만 대통령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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